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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6

처음 만난 남자와 떡볶이를 먹었다. 남자는 몇개월 전 엄마가 식사를 못하셔서 병원을 전전하다 우울증진단을 받고 정신병동에 입원하셨고 퇴원검사 중에 뇌에 종양이 있다는걸 알게 되어 수술을 하셨다 했다. 처음에는 목소리가 떨리더니 침을 여러번 삼키고 진정하는 듯 했다. 그러다 갑자기 남자는 오열하기 시작했다. 기댈곳이 없다했다. 남자는 쓰고 있던 모자를 벗더니 머리를 움켜쥐었다. 손에 들려있던 포크를 내려주었다. 괜찮을거라 했고, 미리 알았으니 운이 좋은거라 했다. 순간 나도 모르게 정수리 어디쯤부터 눈썹언저리까지 손가락으로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영화를 보고 떡볶이를 먹고 일년은 족히 쓸 수 있는 마스크를 선물받았다. 두팔을 벌려 아기처럼 콩콩뛰며 빨리 들어가라고 인사하는 걸 안아주고 싶었지만 참았다. 정말..

끄적거림 2020.11.06

201104

며칠전 망상을 하다가 너무 끔찍한 상상을 해버렸다. 입에 담기조차 싫은 그런 내용이었는데 이런 생각을 했다는 사실에 놀라 한동안 내 자신이 무서웠다. 선생님께는 애둘러 물어봤다가 속마음을 들킬까 금방 그만두었다. SNS로 자신을 표현하는 것은 각자의 개성이라지만, 해시태그 붙이는 공간에 전시하듯 써내놓은 애도는 좀 그만 보고싶다. 잘 살아내야겠다. 이상하게 삶의 의지가 생기는 날이었다.

끄적거림 2020.11.04

201031

연애가 끝이나면 두번은 없었다. 매달리지 않았고 연락이 오면 매정하게 쳐냈다. 다시 받아준건 데이트폭력으로 무서워서 어쩔수 없이 받아줬던 사람과 대건이가 유일했다. 대건이는 내 기상시간에 알람을 맞춰놓고 모닝콜을 하고 다시 자곤 했는데, 연애가 끝나도 그 전화는 항상 왔었다. 발신자표시제한으로 전화가 왔고, 내가 “여보세요”하고 받으면 끊었다. 그렇게 한달정도 지날때쯤 내가 공황인지 뭔지 그 비슷한 무엇으로 공포감이 밀려와 숨이 안쉬어지는 상태로 대건이 한테 전화를 해서 펑펑 울기 시작했다. 대건이는 침착하게 뭐하고 있었냐 물었다. 나는 숨이 넘어가면서 엄마랑 무한도전 본방을 보고있었고 눈물이 나고 불안해서 방에 숨어있다 했다. 대건이는 놀라는 기색 없이 점심은 무얼 먹었냐, 좋아하는 티비프로그램은 봤냐..

끄적거림 2020.10.31

201029

사실 나는 내가 어떤걸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좋아하는게 무엇인지, 싫어하는게 뭔지 모른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내가 누구인지 나는 알지 못 한다. 삼십칠년이란 시간을 가장 가까이 보내놓고는 나는 나를 모른다. 단순히 연애상담이었다. 시작은 쉬운데 유지가 어려웠다. 문제가 생기면 끝이 보였고 싸움이 커지기 전에 일찌감치 그만뒀다. 회피형에다가 싸우거나 이별하는걸 극도로 거부한다고 했다. 슬픔에 직면해본 기억이 많지않아 경험하지 못한데서 오는 불안감이라고 한다. 혹은 반복된 싸움이나 이별로 인한 감정이거나. 싸우는게 싫어서, 이별하는게 싫어서 감정을 숨기는게 발달했단다. 싸우고 이별하는건 흔히 있는 일이라는걸 받아들이라고 한다. 극복하려면 끝까지 싸우는 경험을 하던가, 포기하고 계속 관계를 유지하는 ..

끄적거림 2020.10.29

201026

정민씨가 틴더로 메시지를 보내왔다. 제주도에는 핑크뮬리와 억새가 피었다고 한다. 소식을 듣다가 곰곰히 생각해보니 수연이를 알고지낸 뒤부터 제주를 혼자 여행간적이 없다는게 생각났다. 혼자 가긴 했지만 항상 수연이와 있었던거다. 20대때에는 부산이고 통영이고 혼자서 여행을 다니는 일이 대부분이었는데, 언제부턴가 혼자 무언가를 하는게 힘들어졌다. 어릴땐 뭐하러 그렇게 혼자 다녔는지.. 뒤늦은 사춘기였는지도 모르겠다. 제주도 생각을 오랜만에 길게 했다. 적당한 숙소를 찾아 한달살이를 계획해본다. 한여름밤의 꿈처럼, 나는 모든것를 잊었다. 괜찮다. 가까운 곳에 사는 친구가 좀 있으면 좋겠다. 선생님은 어플같은걸 깔아서 친구를 만나보라 한다. 당장 오래 알고지낸 친구도 못 챙기는데 말이다. 알람을 죽여놓은, 사실상..

끄적거림 2020.10.26

201019

방어기제가 강하다. 아버지에 대한 분노. 엄마와의 과잉애착. 감정표현결여. 자기애부족. 회피성. 침착함. 상황에서 벗어나지 않고 바로 짜증내고 화내볼것. 일기 계속 써볼것. 헤어지는 시간 늘려보기. 반항해보기. 차를 타고 돌아오는동안 빨리 정리해서 쓰고싶다고 생각했는데, 어제부터 몇시간동안 글로 풀어쓰는게 불가능해서 나열한다. 이렇게라도 쓰지않으면 안될것같아 기록한다.

끄적거림 2020.10.19

201016

날이 제법 차졌다. 싱크대 구석이 넣어두었던 찻잎을 꺼냈다. 한번 우리기 시작하면 머그컵으로 두번은 마신다. 다도같은건 모른다. 커피포트에 물을 가득 끓여 머그컵에 찰랑거리게 따른다. 우리집은 좀 많이 차게 있는 편이라, 찻김이 공기의 흐름을 바꾸고 몸을 따뜻하게 해주면 마음까지 따뜻해지는 기분이다. 건조하다. 계절의 건조함에 마음의 건조함까지 더해졌다. 일상은 딱딱히 굳었다. 그나마 근처에 있는 조카들 덕에 간간히 웃으며 지낸다. 왜 그런지 딱딱해졌다. 잘 지내냐는 물음에도 눈물이 그렁거려 누굴 만나는 것 조차 어렵다. 당장 이번 일요일에 있는 약속도 자신이 없어 포기하고싶다만 딱히 둘러댈 말이 없다. 소속감이 나를 지탱해주는데, 나는 더이상 소속이 없다. 하필 또 이럴때 무직상태다. 엎친데 덮쳤다. ..

끄적거림 2020.10.16

201009

자존감은 없고 자존심은 머리꼭대기인 관종. 심리상담을 받는다. 표현방법이 서툴러 화내는것부터 해보라고 과제를 받았다. 스물다섯인가.. 지은이가 우리동네에서 회사친구랑 둘이 술을 마시고 있다고 나를 불렀다. 미리 계획된 자리가 아니면 누가 술마신다 오라하면 무조건 거절하는데, 그날은 지은이가 너무 조르는 터라 억지로 끌려나갔다. 도착해서 술 몇잔 마시지도 않았는데 지은이 회사사람들이 몰려들어왔다. 이야기인즉, 지은이가 여기저기다 전화를 돌렸고 아무도 확답하지않은 상태에서 내가 나간것. 어쩌다니 회식자리에 끼인것같은 요상한 그림이 됐다. 나는 웃으면서 재밌게 놀라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그자리가 너무 불쾌하고 어이없었지만 아무말도 하지않았던 내 자신에게 너무 미안했다. 그런기분이 처음이었다. 내 자신에게 미안..

끄적거림 2020.10.09

201005

우린 잘 맞는다고 생각했다. 아니, 어쩌면 내 지나간 모든 인간관계를 통틀어 다섯손가락이 꼽힐 정도로 잘 맞는 사람일 수도 있었다. 마흔을 바라보는, 혹은 마흔이 된. 아무튼 우리또래의 모두가 그렇듯 상처 하나둘씩은 다 갖고 있기 마련이니까. 겁이 나도 같이 이고 지고 갈 수 있을거라 생각했다. 모두가 아니라고 그랬고, 너도 아니라고 했지만 왜 인지 잘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무 문제 없다고 생각했다. 안고있는 상처때문에 잠시 나를 밀어내는 거라고 그렇게 포장했다. 더 열심히 마음을 내줬다. 그건 확실히 내 속도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렇게 해야만 내 속도의 절반이라도 따라와줄 것 같았다. 그렇게 끝이 났다. 사람은 돌아서는 뒷모습에 민낯을 보인다. 내가 조금만 덜 진심이었어도 우리는 계속 친구일 수..

끄적거림 2020.10.05